돈이 사악해지기까지 | 믿음을 강요하는 화폐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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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el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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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days agoSteemit5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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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를 매개로 하여 이어지던 지중해와 그 연안에서의 교역은 어느 순간 급작스레 중단된다. 아직도 그 원인이 확실하지 않은 해양 민족의 대이동 때문인데, 대이동을 촉발한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그 과정에서 당시 거의 모든 문명이 파멸하고 문자마저 사라질 정도로 파괴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내륙 깊숙하게 근거지를 둔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제외한 지중해 연안의 거의 모든 문명은 이 해양 민족의 대이동 과정에서 철저하게 파괴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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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author Lommes



그나마 남아있는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사료를 확인하면 다양한 민족들의 연합이 닥치는 대로 지중해 동부 연안의 문명들을 파괴했는데, 이들은 청동기 시대의 그리스인, 시칠리아인, 사르데냐인, 에트루리아인의 선조, 아나톨리아 반도의 일부 민족들이었다. 사실상 지중해 전역의 민족들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서로를 죽고 죽였다. 당시 아나톨리아의 패자 히타이트도 멸망을 피하지 못했는데, 철저하게 파괴되고 불타는 건물 속에서 문자가 기록된 점토판이 잘 구워져 보존되었기에 후세에 일부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기로 쓸 금속이 부족하니 신전의 모든 금속도 녹여라.


우리도 공격을 당하고 있어 동맹 도시에 원군을 보낼 수 없다.



대혼란의 다급한 상황만을 점토판에 새겨둔 채 소멸한 나라들. 약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1150년 사이의 50년 동안 기이할 정도로 급속도로 문명들이 사라져버렸다. 보통 정복 전쟁이 일어나면 정복자는 패배한 측의 도시를 점령하여 그 이점을 누린다. 철저하게 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는다 한들 도시 자체가 소멸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시기에 몰락한 도시들은 멸망한 이후 철저하게 버려졌으며, 같은 장소에 다시는 도시가 세워지지 않았다.



한바탕의 파괴적 혼돈이 지나간 후, 그 폐허 주변으로는 겨우겨우 생존한 일부 사람들이 다시금 도시를 재건했다. 리디아가 그중 한 나라이고, 스파르타가 위치했던 펠로폰네소스 지역은 거주민의 90% 이상이 죽거나 달아났기에,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남아 폴리스 형태의 도시 국가를 재건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도 겨우 명목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버텨내던 시기를 지나면서, 대외 교역에 생존 그 자체가 걸린 시기가 도래했다.



이 대혼란의 시기를 극복하고 생존을 위한 교역이 행해짐에 있어 교환 수단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회복되어야만 했다. 때문에 시금석이 사용되었던 것이고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은 강력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일렉트럼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안간힘을 쓰며 가까스로 연명하던 오리엔트 세계가 한 민족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란 고원 깊숙한 곳에서 힘을 길러온 페르시아는 해양 민족의 대이동 시기에 피해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인류 역사의 메인 스테이지를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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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란 지역에 세워졌던 여러 왕조와 제국을 흔히 페르시아라 통칭한다. 북서부에는 메디아 왕국이 있었고, 남부 고원 지대에서는 페르시아, 동쪽으로 가면 아리아와 파르티아, 박트리아가 있었다. 그중 메디아 왕국이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냈는데, 메디아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아시리아를 무너뜨리며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메디아 왕국은 자그로스 산맥 동쪽을 근거지로 삼다 차츰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향해 서진했는데, 북쪽에서 밀고 내려온 스키타이 인들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다는 주장이 있다. 스키타이 인들 때문에 한때 정치적 공백기까지 왔던 점을 감안하면 이 주장이 사실일 것이다. 한 때는 아나톨리아 반도 깊숙한 곳까지 치고 들어가 큰 왕국을 세웠으나 짧은 전성기를 보낸 후 페르시아에 흡수된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메디아를 흡수한 데 이어 리디아를 멸망시켰고, 당시 최강이었던 신 바빌로니아 왕국마저 무너뜨리며 강렬하게 세력을 키웠다. 페르시아는 남으로 이집트를 정복했고, 동으로는 인더스 강까지 진출했으며, 서쪽으로는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까지 손에 넣었다. 다리우스 1세 때 제국의 판도는 최대에 달해 사실상 중국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의 문명을 하나로 묶었다. 페르시아가 세계였고, 세계는 페르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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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 세계를 하나로 묶다시피했던 페르시아는 멈추지 않고 그리스와도 격돌하게 되는데, 영화 300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이다. 영화 300 에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나온다. 페르시아와의 강화를 종용하던 원로원 의원이 칼에 맞고 쓰러지며 금화 주머니를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이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금화에 새겨진 페르시아 왕의 얼굴을 보고, 칼에 맞은 의원이 페르시아에 매수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다리우스 1세는 리디아의 강력한 화폐 제도에 매료되었다. 따라서 페르시아 만의 금화와 은화를 주조했고, 그 동전 한 면에 페르시아의 상징인 사자와 황소를 새겼다. 나중에는 궁사를 새겨 넣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왕을 상징했다. 금과 은의 내재 가치로는 부족했는지 국가가 직접 나서 이 화폐는 신뢰할만한 화폐다 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국가의 상징을 화폐에 각인했으리라. 그리고 그 쓰임새를 보증하기 위해 다리우스는 모든 세금을 금화와 은화로 거두어들였다. 가치를 공권력으로 보증하고 쓰임새를 제도로써 보증하자 바야흐로 페르시아의 화폐는 지중해와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패권국이 화폐에 가치와 믿음을 강제로 심는 행위는 수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이렇게 빠르게 내정을 정비한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시기에 걸쳐 페르시아는 그리스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우리는 대제국의 숙명을 주목해야 한다. 대제국이 운영되려면 천문학적인 자본이 필요하다. 하나의 유기체로서 돌아가기 위한 관료 집단과 인프라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페르시아도 세계의 패자가 되자마자 인프라 투자에 열을 올렸다. 수사에서 사르디스로 이어지는 장장 2,700km 의 왕의 길을 건설하는 등 제국을 하나로 묶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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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커지는 제국은 돈이 필요하다.
고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실체가 없는 돈을 만들어낼 수 없었고, 미래에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돈을 현재로 끌어올 수단이 없었다. 따라서 정복 전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국이 유지되려면 끊임없이 타국에서 재화를 뺏어와 실물 경제에 투입을 해야 했고, 정복 전쟁을 멈추기라도 하면 그 순간 제국은 가장 지출이 큰 시기에 수입은 가장 적은 상황에 놓이고는 했다.



이미 이집트의 금과 아나톨리아의 금을 손에 넣은 페르시아는 더욱 많은 금과 은이 필요했고, 그리스에는 풍부한 은광이 있었다. 그리스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면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스파르타가 양대 축을 형성했는데, 아테네는 라우리온 지역에 풍부한 은광이 있어 화폐 주조권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맹주 역할을 자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풍부한 은은 외적을 불러들였다.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와 스파르타 300인 부대가 장렬히 전사한 테르모필라이 전투, 크세르크세스 눈앞에서 페르시아의 함대가 무참히 박살 난 살라미스 해전의 결과 그리스는 페르시아를 막아냈고, 승자의 기쁨을 잠시나마 누렸다. 페르시아는 국력을 총동원한 전쟁에서 얻은 것이 없었기에 곧 쇠락의 길을 걷고, 페르시아를 막아낸 그리스도 결과적으로는 지출만이 있었던 전쟁의 승자였다. 게다가 곧이어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놓고 온 폴리스 국가들이 반으로 갈려 충돌하였고, 전쟁과 전쟁, 지출에 지출이 거듭되어 쇠약해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에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휘몰아친다.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은 알렉산드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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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치, 희소성, 합의 그리고 믿음
#2 아름다움
#3 환경
#4 누비아의 금
#5 일렉트럼 : Electrum
#6 믿음을 강요하는 화폐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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