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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 : 구운 과자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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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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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줄평


 울었다

 포스터 너무 해맑아서 슬프잖아
 잉여인간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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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학교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코너를 지나 주유소 앞에서 갑자기 친구가 "어? 꾸숑이다!" 하면서 주차되어 있던 차뒤에 확 숨더군요. 영문도 모르고 저도 덩달아 급히 숨었는데 "야! 너희 이리 나와!" 하며 꾸짖듯이 꾸숑이 저희를 불렀습니다.

무슨 죄진 학생마냥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 갔고, 그는 "무슨 남자 새끼들이 기집애 마냥 그렇게 뒤에 숨어서 속삭이냐"며 제 손에 들고 있던 연습장을 뺐더니 싸인을 두장 해주고는 쿨하게 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습니다.ㅎㅎ 순식간에 싸인테러를 당한 저와 친구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연예인 봤다고 막 자랑하고 다녔었죠. 그 터프가이가 바로 위의 사진 속 '최민식' 이었습니다.

당시 야망의 세월과 서울의 달로 한창 인기가 있을 때였거든요. 꾸숑은 야망의 세월의 극중 이름. (아... 빼박 아저씨) 제가 만난 연예인이 강부자가 다인 줄 알았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잠시 스쳐 본것까지 하면 꽤 있더라고요.ㅎㅎ 최민식이 이렇게 대배우가 될 줄 알았으면 그때 싸인을 잘 보관해 둘껄...

어제 축구 결승을 보는데 버퍼링때문에 골장면 다 놓치고 화딱지 나서 후반전에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유튜브를 뒤지던 중 '파이란' 풀버전이 올라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주말이라 리뷰는 쉬려고 했는데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다' 하고 감상 후 이렇게 리뷰글을 올립니다. 어제 SCOT이 또 중단되는 바람에 이제야 올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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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이란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철도원'에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러브레터'가 원작입니다. (오겡끼데스까 아님) 전체적인 플롯은 비슷하지만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각색되었습니다. (여주인공 이름은 '백란'으로 동일하지만 원작에서는 매춘부로 나옵니다.)

2001년 당시, 한달 먼저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친구'의 초대박 흥행에 밀려 추정관객 전국 40~60만 정도에 머물고 만 비운의 영화입니다. 훗날 각종 수상과 입소문을 타서 명작의 반열에 합류해 뒤늦게 빛을 보긴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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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어머니를 잃고 혼자가 된 강백란(북경어 현지 발음으로 파이란)은 이모를 찾아 한국으로 가라는 어머니의 쪽지를 들고 무작정 한국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모는 이미 한참 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상태였지요. 고향으로 돌아간들 딱히 받아줄 곳도 할일도 없던 그녀는 한국에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로 합니다.

한국에서 직장을 얻고 장기체류를 하기 위해서는 브로커를 통해 위장결혼을 해야만 했는데 결국 인력사무소의 주선으로 얼굴한번 본 적없는 한국남자와 서류상 혼인관계를 맺게 됩니다. 브로커 경수(공형진)를 따라 처음 가게된 직장은 룸살롱. 그곳에 팔려갈 위기에 놓인 파이란은 기지를 발휘해 볼을 깨물어 피를 토해 결핵환자로 위장을 하고 위기를 모면합니다. 결국 강원도 춘천, 한 시골의 허름한 세탁소에 취직을 하게 되고 그녀는 그렇게 한국에 정착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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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가운 세탁소 주인에게 인정도 받고 이제 삶에 여유와 안정이 생긴 파이란은 한국 정착을 도와준 서류상 남편 이강재의 증명사진을 바라보며 감사와 위로를 느끼고 결혼 선물로 받은 (그렇게 믿고 있는) 빨간 스카프를 고이 간직하고 점점 그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언젠가 함께할 날을 기다리며 칫솔도 사두며 행복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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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박명이라 했던가요... 어느날 갑자기 기침을 하다가 피를 토하고 자신이 실제로 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 생각엔 어머니도 결핵으로 사망하고 전염이 된 것 같은데 (결핵을 연기한 장면에서 그렇게 추측) 자신이 엄마처럼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걸 감지한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편 이강재를 만나기 위해 주소를 찾아 그를 방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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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하고 있던 이강재의 실물을 유리창 너머로 처음 확인한 그녀. 손거울로 자신을 단장하고 떨리는 맘으로 그에게 건낼 첫 인사말을 연습합니다. 문을 열려는 찰라... 갑자기 들이닥치는 경찰들... 그리고 불법야동유통죄로 체포되어 이송되는 이강재... 그렇게 둘의 첫만남은 스치듯이 지나가고 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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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이강재와 말한번 섞어보지 못한 파이란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제가 미국에 막와서 향수병에 젖어 있을때 이 영화를 보고 파이란에 감정이입되어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슴이 아리고 먹먹해지는 슬픔이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이후 또한번 깊숙히 감성을 자극했던 영화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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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관객의 눈물샘 뇌관을 터트리는 지점이 두 곳 있습니다. 첫번째는 세탁소 주인아주머니가 애통해하며 강재를 타박하는 장면...
"야가 신랑이가? 어떻게 인자오나? 야가 얼매나 기다렸는데 인자와? 사람이 어떻게 그랠수가 있는기래... 야가 얼매나 기다렸는데 왜 이자서와?..." (음성지원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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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파제에서 파이란이 죽기전 확신이 없어 부치지 못한 유서를 읽고 오열하는 장면... 일평생 삼류生양아치 인간쓰레기 잉여인간으로 살아온 자신을 소중한 존재이자 의미있는 존재라고 불러준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고마움과 온갖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그안에서 휘몰아쳤을 겁니다. 그 오열하는 명장면은 우리 모두를 울렸지요.

영화는 파이란의 이야기와 이강재의 이야기가 교차편집되어 스토리를 극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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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이 세탁소에서 일한 첫날, 주인 아주머니는 파이란에게 '인간세탁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요. 마당에 가득 걸린 흰세탁물들을 보면서 강재의 더럽고 추잡했던 삶이 앞으로 파이란의 순정을 통해 깨끗하게 구원받을 거라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파이란의 죽음 이후,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서류상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강재는 위장결혼의 의심을 벗고자 그곳을 방문합니다. 기차안에서, 그에게 도착했지만 전달되지 않았던 한장의 편지와 그녀의 증명 사진을 보며 강재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꿈틀대기 시작하지요. 양복을 구입해 예를 갖추고 무심하게 사망처리하는 경찰에게 시비도 걸고 그렇게 자신을 생애 처음으로 의미있게 봐 준 파이란을 향한 몸무림을 시작합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장례식장. 그녀는 강재가 선물한 스카프를 두른채 영정사진이 되어 그를 맞이하고 있었지요. 만약 강재의 증명사진이 옆에 있었다면 커플 스카프를 한 다정한 모습처럼 보였을 거에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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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야 마주하게된 두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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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갑자기 장백지가 눈을 움찔해서 깜놀...


유골이 되어서야 강재의 품에 안기게 된 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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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는 그녀의 유골을 안고 새로운 삶을 살기위한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단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의 죽음의 순간에는 경수가 찍어둔 비디오속 그녀가 함께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강재는 그녀를 눈에 담으려 애씁니다.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달라는 유서의 내용처럼 그렇게 그는 파이란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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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면서 마지막에 장백지가 귀신이 되어 최민식에게 복수하는 것 같아서 좀 무섭긴 했습니다.ㅎㅎ 강재의 역할은 최민식을 대체할 배우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딱 맞는 옷이었고 어리둥절 눈치없는 공형진의 깨알같은 연기도 참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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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한국영화 중 가장 슬프고 가슴아팠던 영화 '파이란'! 보신지 한참 되셨다면 다시 꺼내 보셔도 또다른 감동을 받으실 겁니다. 단 우울한 날엔 피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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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튼키위즈 (Rotten Kiwies) 평점 100%
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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